[고인돌과 천체현상] 영광 홍농 진덕리고인돌과 선사인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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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과 천체현상] 영광 홍농 진덕리고인돌과 선사인의 고민
  • 유창수 기자
  • 승인 2022.04.0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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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렬 (사)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
이병렬 (사)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

[글로벌신문]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계절을 잊고 사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해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모르고 살아간다. 물론 여름의 더위나 겨울의 추위도 옛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회색빛 건물 속에서 에어컨과 온풍기에 젖어 시간을 잊은 지 오래다. 아마 선사인들이 현대인들을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현대인들은 계절도 모르면서 어떻게 먹고 사냐고 물음을 던질지 모른다. 얼마나 서로 웃기는 일인가? 현대인들은 도대체 그렇게 할 일이 없어서 죽도록 고생해 고인돌이나 만들고, 그 고인돌에 태양의 움직임을 기록해서 뭘 할 건지 답답한 것은 매한가지이다. 그냥 스마트폰을 열면 날짜뿐만 아니라 자세한 기후나 기상여건을 매 시간마다 알 수 있는데 말이다. 밤하늘의 별자리나 행성의 움직임을 통해 자연현상을 얼마나 이해한다고 밤이슬을 맞으며 밤새도록 별이나 보냐고 타박할지 모른다. 뭔가를 보는 시각은 이렇게 다르다.

근데 정작 우리 현대인들은 과거 수 천 년 전에 선사인들이 쌓아 놓은 과학적 탐구의 결과가 스마트폰 속의 정보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그들이 밤낮으로 확인하고 계산한 것이 절기가 되고 계절이 되었다. 이를 더욱 분절하여 시분초의 개념을 정립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너무 쓸데없이 세분해 또 나누어 사는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은 과거 선사인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분절된 시간의 개념을 정립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가려 하고 있다. 아마 우리 후대들은 더욱 분절된 시간을 가질 것이다. 점점 시간에 얽혀 사는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아마 선사인들은 현대인들이 이렇게까지 시간을 분절할 것은 예측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선사인들은 이 땅에 살아갈 후예들을 걱정했는지도 모른다. 누구든 뭔가 남기려할 때는 당연히 묘비나 상석 등과 같이 당대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 기록은 당시의 상식이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선사시대 당시 문자가 없었다. 그러니 뻔히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거나 이해되는 뭔가로 당시의 상식을 남겼다. 다만 현재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선사인들은 천문학과 같은 고급정보를 고인돌과 같은 거석문화로 남겼다. 그 거석문화는 현대인들에게 미스터리하고 난해한 고인돌코드다.

영광군 홍농읍 진덕리 303-5번지의 논둑에는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제법 큰 고인돌이 한 기 있다. 선사인들은 왜 하필이면 이렇게 큰 고인돌을 이곳에 왜 무슨 용도로 세웠을까? 무턱대고 아무 곳에나 이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했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마을의 논 한가운데 턱하니 놓았다. 고인돌의 굄돌은 5개이고, 덮개돌의 생김새도 어느 방향으로 특정했는지 난해하다. 즉, 고인돌 덮개돌의 모형이 특정한 형태를 띠지 않는다. 특정한 모형이 아닌 경우 장축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덮개돌이 마름모꼴처럼 보이기는 하나 애매하다. 요리조리 살펴봐도 고인돌의 방향을 속단하기 어렵다. 드론으로 촬영해 고인돌의 장축 방위각을 측정하려 해도 마름모꼴의 장축인 북극성을 가리키는 진북방향 외에는 뚜렷하게 천체와 연관된 것이 없다. 마름모꼴형의 고인돌 덮개돌의 장축 방위각이 진북과 진남을 가리키는 것 이외는 속단하기가 어렵다.

그 마름모꼴의 덮개돌 양쪽의 단축은 부드럽게 잘린 듯 둥그런 모형이다. 동그랗게 꺾인 부분에서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각각 60°, 95°, 120°로 특정 절기와 관련을 지었다. 이 방위각의 정면 지표면은 가깝게는 바로 앞의 구릉의 산지이고, 멀리는 인근의 높다란 산봉우리들을 가리킨다. 지표면의 60° 방면은 하짓날 일출지점이다. 동북쪽의 나지막한 구릉을 지나 약 6km거리에 있는 상하 장사산(269.9m) 정상에서 하짓날 태양이 떠오른다. 지표면의 95°는 춘분과 추분의 일출지점이다. 동쪽의 무장 덕림산(142.2m) 정상에서 춘분과 추분의 태양이 떠오른다. 지표면의 120°는 동짓날 일출지점이다. 동남쪽의 약 980m거리에 있는 망덕산의 바로 남쪽 아래 봉우리에서 동짓날 태양이 떠오른다.

홍농 진덕리는 북쪽으로 크게 열린 지형으로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철 매우 추운 곳이다. 그리고 마을 아래까지 조수의 피해를 받았으니 얼마나 자연환경이 열악했겠는가? 선사인들이 자룡천까지 간척하여 농토를 넓혔다 하더라도 조수의 피해는 막을 수 없었다. 진덕리는 물이 늘 부족했다. 자룡천을 따라 깊숙이 들어오는 조수는 고인돌이 아래까지 밀려들어와 종종 염해의 피해를 입었다. 지금이야 발달한 토목기술 덕분에 안전한 농토가 많이 늘어났다. 그러니 청동기시대 진덕리는 결코 안전한 농토가 많거나 농경에 유리한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구는 급증하였고, 필요에 의해 간척지는 개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선사시대 간척기술의 한계와 염분피해를 막기 위한 수리시설은 부족했다. 진덕리 선사인들에게 있어 하지 전후의 농업용수의 획득 여부는 일년 농사의 갈림길이었다. 물론 물의 획득을 위한 활동은 고단한 삶의 일부였다. 고인돌 주변에 산들은 있지만 골이 깊지 않아 농업용수는 늘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은 풍년을 기원하는 기우제와 간척지의 염해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선사인들은 천제와 기우제를 드렸다. 영원무궁할거라 믿는 거석인 고인돌을 축조하고 그 위에서 정성스럽게 올렸다. 진덕리고인돌은 인류의 원형인 북극성을 향해 인간의 간절함을 담아 소원을 드리고 절기를 통해 풍년을 기원한 성소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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