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굴비 이야기] ‘굽을 굴(屈)’ ‘아닐 비(非)’ “굽히지 않는다”는 이자겸의 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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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굴비 이야기] ‘굽을 굴(屈)’ ‘아닐 비(非)’ “굽히지 않는다”는 이자겸의 굴비
  • 유창수 기자
  • 승인 2020.08.06 16: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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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오르고 알이 차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던 법성포 특산품

“돈 실러 가세/돈 실러 가세/영광 법성으로 돈 실러 가세.”

옛날 행상들의 보따리 제일 깊숙한 곳엔 굴비가 주요 품목으로 들어있었다고 한다. 굴비는 다른 종류의 건어물과는 달리 내장의 어느 부분도 손상시키지 않고 원형대로 해풍에 말린 생선이다. 제수용으로 비싼 대우를 받았다. 그 맛이 좋아 예로부터 밥반찬으로도 국민사이에서 인기 있는 ‘고급 반찬’으로 자리 잡았다.

제주도 남서쪽에서 겨울을 난 조기떼는 2월이 되면 북상, 흑산도 근해를 거쳐 법성포 앞 칠산바다를 지나 연평도를 돌면서 알을 낳고 다시 회귀 한다. 진달래 꽃이 피기 시작하는 3월부터 한식(寒食), 곡우(穀雨)를 거치는 사이에 칠산 앞바다를 지난다. 이때 살이 오르고 알이 든 가장 좋은 조기가 된다. 자연스럽게 법성포 항은 수백 척의 어선으로 북적댔다. 알찬 조기를 잡아 말려 굴비를 만들었다.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 법성포 마을은 전국 굴비의 반 이상을 생산했다. 이곳 바람을 맞고 마른 굴비라야 제 맛이 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산하는 영광굴비는 예부터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던 특산품이다. 그러나 지금은 동지나해에서 흑산도를 통과하는 사이에 최신장비로 무장한 기선저인망, 안강망선단이 씨까지 말릴 정도로 훑어 버린다.

예전에는 봄철 칠산앞바다에서 조기를 잡아 법성포에서 말려야만 진짜 ‘영광굴비’라고 했지만, 요즘에는 어획량이 줄다보니 어획장소에 관계없이 유자망으로 잡힌 배란기의 참조기를 법성포의 해풍으로 말리기만 해도 ‘영광굴비’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굴비’ 어획량이 줄어 ‘금 굴비’가 되어 참조기 생산량이 수요에 맞추어 공급을 할 수 없어 가격이 워낙 비싸다 보니 참조기를 닮은 것들이 굴비로 둔갑하기도 한다.

진짜 ‘영광굴비’는 법성포의 따스한 햇살과 해풍, 그리고 특유의 염장기술이 3위 1체가 되어야만 참조기의 독특한 맛을 낼 수 있다.

인근 서해안에서 생산된 질 좋은 천일염으로 3년 이상 저장된 것을 사용하여야 소금자체의 쓴맛을 없앨 수 있고, 염도가 낮아져 짠맛도 덜하다. 이러한 천일염을 아가미에 정성껏 채워 3일 동안 소금기가 배어들게 한다. 이러한 염장과정을 거쳐 낮에는 45%이하, 밤에는 95% 이상 되는 습도를 함유한 칠산바다의 해풍으로 말려야 영광굴비의 참맛을 볼 수 있다.

굴비는 사람의 기운을 복돋워주는 효혐이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조기(助氣)라 불려왔다고 한다.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말린 것을 굴비라고 한다. 같은 생선인데 왜 말리지 않은 것은 조기라고 하고 말린 것은 굴비라고 할까? 한여름철의 보신용으로도 사용했던 굴비의 유래는 고려 말 인종 때부터로 알려진다.

한자로 ‘굽을 굽(屈)’과 ‘아닐 비(非)’에서 유래된 굴비는 ‘굽히지 않는다’라는 뜻을 지녔다. 생선 이름치고는 참 특이한 이름이다. 조기가 굴비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시대의 척신(임금과 성이 다르나 일가인 신하) ‘이자겸(李資謙 ?~1126)’ 때문이다. 이자겸은 자기 딸을 고려 16대 임금인 예종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리고 자기 손자를 임금(인종)으로 만들었다. 왕의 외할아버지가 된 이자겸은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이자겸은 그것도 모자라 자기 딸 둘을 다시 인종에게 시집을 보낸다. 인종은 이모들과 결혼을 한 것이고, 이자겸은 임금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자겸은 임금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나랏일을 자기 마음대로 했다. 이자겸의 횡포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임금이 되기 위해서 임금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패하였고 이자겸은 전라남도 영광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자겸은 영광에서 소금에 절여 말린 조기를 먹게 되었다. “조기 맛이 아주 기가 막히구나! 이렇게 맛있는 생선은 임금님도 못 먹어 봤을걸.” 조기 맛에 반한 이자겸은 영광의 조기를 임금님에게 보냈다. 이자겸은 조기를 보내면서 굴비의 맛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해서 “비록 귀양살이를 하지만 결코 비굴하게 어떠한 불의(不義)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의 ‘굴비(屈非)’라는 이름을 적어 보냈다고 한다. 이자겸의 뜻을 임금이 알아차렸는지는 모르지만 임금도 굴비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그 후로 소금에 절여 말린 조기를 굴비라고 불렀고, 영광 굴비는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명물이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자겸이 임금에게 굴비를 선물로 보낸 이유 때문인지 굴비는 귀한 사람에게 드리는 선물로 인기가 많았다.

나라마다 좋아하는 생선이 다르다. 중국 사람은 잉어, 일본 사람은 도미, 미국 사람은 연어, 프랑스 사람은 넙치, 덴마크 사람은 대구, 아프리카 사람은 메기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생선은 조기이다.

조기는 역사가 아주 깊은 생선이다. 중국의 고대 문헌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낙랑에서 조기가 난다고 씌어 있다. ‘임원십육지’에서는 석수어라 하여 식용으로보다 설사나 소화제 또는 해독제로 좋다고 했다.

조기의 우수한 단백질은 아이의 발육이나 노인의 원기 회복에 좋으며, 소화도 잘 되고, 머릿속에 있는 이석을 갈아서 결석증을 치료하기도 한다. 회로는 많이 먹지 않는데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도 “조기는 봄에 나는 것이라 회를 치면 빛은 희고 좋으나 맛은 슴슴하여 신통할 것이 없다”고 했다.

싱싱한 조기는 토막 내어 고기 장국에 넣어 맑은장국을 끓여도 시원하고, 고추장이나 고춧가루를 풀어서 얼큰한 매운탕을 끓여도 좋다. ‘조선요리제법’에서는 “자반조기는 참기름을 발라서 구우면 매우 좋으며 혹 물을 부어 파와 고추와 버섯을 넣고 쪄 먹기도 한다”고 했다.

예전에는 법성포의 굴비는 산란기인 봄철 두어달동안 성시를 이루었으나 냉동기술의 발달과 함께 전국에서 잡아오는 조기를 아무 때나 확보할 수 있어 지금은 연중무휴다. 또한 덕장에서 주기를 말리기에 가장 분주한 시기도 봄철에서 제수용으로 많이 소비되는 추석을 앞둔 시기로 변했다. 또 성인병의 원인으로 인식되는 짠맛에 대한 현대인의 기피로 인해 소금을 적게 쓰고 약간만 말려 짜지 않도록 굴비의 맛도 싱겁게 개량됐다.

한때 조기철이면 흥청대던 법성포와 칠산 어장도 지금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굴비의 어획량이 눈에 띄게 줄어 이제는 조기를 잡으려면 먼 바다까지 나가야 하는 형편이다. 하지만 아직도 법성포에서 염장해서 서해 해풍에 말린 조기 맛만큼은 누구도, 어디서도 흉내 낼 수 없는 우리네 먹거리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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